민족통일강원도협의회 - 제53회 한민족통일문화제전
(by 성림초등학교 고준)
민족통일강원도협의회 - 제53회 한민족통일문화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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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강원도협의회 - 제53회 한민족통일문화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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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이루어 지면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가장 좋은 점은 갈라진 민족이 다시 하나로 뭉쳐져서 민족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는 점일 거예요. 그리고 북한에 있는 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 분단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나라의 갈등도 줄어들 거고, 국방비 등도 줄어들어서 나라의 경제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우수한 노동력이 늘어나니까 우리나라 상품이 좀 더 경쟁력이 있게 될 거고요.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통일되었던 독일에서는 초기에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인 격차로 인해서 경제 침체가 있었고, 실업 문제가 상당했었대요. 그리고 지역 간 이질적인 문화차이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도 대단히 많았다고 해요.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만큼의 통일 비용과 국민 각자의 노력도 꼭 필요해요. 그래서 그런지 어느 여론 조사에서 보니까 통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해요. 분단 상황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그 분단 상황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어요. 그래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잖아요. 제가 이 노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혹시 ‘국군포로’를 아시나요?
‘국군포로’는 6·25전쟁의 휴전 협상 과정에서 북측에서 송환되지 않은 국군 실종자를 말합니다. 전쟁 중 끝난 후에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의 장병들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가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국군포로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입니다.
1998년 8월에 중장비 기사로 일하고 있던 장영욱 씨에게 아버지를 데리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전하셨다가 돌아가셨고, 전사 통지서도 받아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했는데 “나 좀, 집으로 데려가 줘!”라는 말씀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몇 차례 전화가 더 왔지만, 돌잡이 아이였던 장영욱 선생님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부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사촌 형에게 통화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난 길 골목 하나하나와 이웃 이름을 사촌 형 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통화를 계속하면서 진짜 아버지가 살아계신 걸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45년 만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 가족들에게 알리신 분은 바로 일병 장무환님입니다.
장무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으려고 군대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몸에 병이 생겨서 제대하셨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고 고향인 울진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하셔서 고향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 되시는 장순남 할머니를 만나서 결혼도 하시고, 아드님도 낳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깐이었고 다시 세 번째로 군대에 가게 됩니다. 국군 징집 명령받으셨고, 휴전 협정이 한창일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포로들처럼 탄광에 끌려가서 고생하시다가 72살의 나이에 국경을 건너 탈북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45년 만에 중국에서 가족들이 만났습니다. 아드님은 장무환 일병님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절을 올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를 나와 동행했고, 모두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방송국에서 동행 취재를 나섰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이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 화도 나고 힘든 과정을 거치셔야 했습니다. 국경 근처에서 겨우겨우 우리나라로 올 수 있는 항구 도시까지 왔지만, 문제는 여권이었습니다. 장무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사망자 신분이었고, 북한 주민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고 있던 어느 날 조카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누군지 묻지도 말고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고 서울의 한 호텔 로비로 나오라는 전화였습니다. 그곳에서 누군지 밝힐 수 없는 분이 장무환 할아버지의 여권을 건네주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오신 후에 백골 부대에서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시면서 면역 식을 치르고 정말 긴 군 생활을 끝내셨습니다. 면역 식은 오랫동안 군대 생활을 하신 분의 군역을 면해주는 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10년 만이라도 오순도순 살자고 말씀하신 것처럼 두 분이 함께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오셔서도 장무환 할아버지는 편하게 지내시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북에서도 결혼하셔서 가족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북에서 계실 때는 남쪽 가족은 그리워하셨고, 남에 오셔서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남과 북 모두에서 일평생을 이산가족으로 살아가신 겁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다시 보는 내내 화가 나기도 하고, 죄송스러운 마음도 계속 들었습니다. 국군 포로로 끌려가셔서 장무환 할아버지는 ‘언젠가 분명히 우리를 데리러 오겠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전 협정이 끝나고 북한은 우리에게 전쟁포로는 한 명도 없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북에 남아 계시는 국군 포로들은 포로로서 인정도 받지 못하시고, 남한에서는 그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작성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조국을 위해서 피 흘리신 분들이 스스로 힘으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탈출하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은 조국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지만, 어쩌면 남과 북 모두에게서 잊힌 존재들일지 모릅니다.
사전에서 “이산가족이란 가족의 구성원이 본의 아니게 흩어짐으로써 서로 만날 수 없게 된 가족. 가족이 이산되는 데는 자연적 원인과 인위적 원인이 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통일된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지내시는 이산가족분들일 거로 생각합니다. 국군포로들 역시 6·25 전쟁이라는 인위적 원인으로 이산가족이 되신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살아 계시면 지금은 90살이 넘으셨을 거로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우신 분들은 더욱더 국가가 지키고 예우해 드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잊고 살아 온 이산가족들인, 또 다른 장무환 일병 구출 작전들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민족통일강원도협의회 - 제53회 한민족통일문화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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